중복 상장 전면 금지와 벤처캐피탈

 

“거래소 측이 업계 목소리를 듣는 공개 행사에서 일방적으로 불가 입장만 고수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한 벤처투자사 담당자가 지난 5월 열린 간담회에 참석한 후 이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거래소가 중복 상장 전면 금지와 관련해 현장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마련한 자리였지만, 정작 거래소 임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한 태도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투자금융 전문가들이 국내 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미 결정된 방침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히려 벤처 투자자들의 의욕만 꺾이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 중복 상장 금지 제도의 배경

이 제도는 국내 증권 시장의 오랜 문제인 ‘코리아 할인’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자본시장 개선 정책의 일환입니다. 상장 기업이 키워낸 우수한 자회사를 분리해 다시 상장하는 방식은 오래전부터 시장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기존 모기업 주주들의 이익이 분산되어 손해를 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국내 증시 전체 시가총액 중 중복 상장 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8%로, 일본 4%, 미국 0.05% 등 선진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금융 당국과 거래소가 이 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취지 자체는 이해되지만, 업계에서는 시장 위축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 벤처투자사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

국내 벤처 투자에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입니다. 구주 매각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기업 공개 상장이 사실상 유일한 투자금 회수 수단입니다.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데 보통 7~8년 이상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장을 통해 투자금 회수를 기대하던 투자자들은 갑작스럽게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복 상장 구주는 구주 매각 시장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니, 법이 허용했던 범위에서 기업을 발굴했던 벤처투자사들은 강제로 초장기 투자를 하게 된 셈입니다.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벤처기업은 성장이 가능하겠지만, 중소기업을 모기업으로 두고 있는 스타트업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벤처투자사들이 중소기업 상장사에 대한 예외 적용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정부 정책과의 모순

시장을 위축시키는 이 규제는 정부가 추진하는 벤처 투자 활성화 정책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정부는 6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벤처 투자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중심으로 올해 벤처 투자 시장은 출자 사업의 풍년을 맞았습니다. 최근 대형 투자사를 떠나 신생 벤처투자사를 설립하거나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탈을 만드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커지고 있는데 유일한 투자금 회수 수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오히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거래소 임원이 세미나에서 무조건 불가 입장을 고수한 것은 정책을 추진하는 금융 당국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업계 의견을 듣는 공개 자리에서, 그것도 거래소가 직접 주최한 행사에서 이렇게까지 단정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거래소가 금융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업계 의견을 검토해보겠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해도 금융 당국, 정부는 물론 현장에 있던 참석자 모두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겉으로만 업계 의견 청취 행사일 뿐, 주최 측인 거래소의 일방적인 진행이 아쉬운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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