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채권 금리가 오르는 가운데,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사전 예고 지침마저 사라지면서 시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해 초대형 클라우드 사업자들이 막대한 규모의 회사채를 쏟아내면서 채권 가격 하락 압력이 심화되는 상황이다.
지난 12일 증시에 등록한 우주항공 기업조차 기존 부채 상환을 목적으로 30조 원이 넘는 회사채 발행 계획을 밝혔다.
금융계에서는 중앙은행이 금리 조정에 대한 힌트 없이 인상 가능성만 남겨둔 상태에서 대량의 회사채가 시장에 쏟아지자, 한동안 채권 금리가 상승 압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주기업, 상장 직후 대규모 자금 조달 나서
최근 채권시장에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중동 협상이 진전을 보였음에도 이전 거래일 대비 0.05%포인트 상승한 4.51%를 기록하며 심리적 저항선인 4.5%를 재차 넘어섰다. 지난 10일 이후 7거래일 만의 일이다.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미중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지난달 15일 이후 한 달 넘게 4.5% 선에서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통화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2년 만기 국채 금리는 4.23%까지 치솟으며 지난해 2월 이후 최고 수준에 달했다.
주택담보대출과 우량 기업 채권 금리의 기준이 되는 30년물 금리 역시 4.94%로 5.0% 문턱에 다시 근접했다.
지난 12일 나스닥 시장에 상장한 우주항공 기업이 30조 원이 넘는 회사채를 발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이날 채권 금리를 직접적으로 끌어올렸다.
관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기업은 투자자들과의 전화회의에서 첫 회사채 발행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 소식에 해당 기업 주가는 하루 만에 16.43%나 급락했다.
시가총액이 하루 약 600조 원 증발하며 뉴욕 증시 역사상 두 번째 기록을 세웠다. 역대 최대 기록은 지난해 1월 중국의 생성형 인공지능 열풍으로 주가가 16.97% 하락하고 시총 약 880조 원이 줄어든 반도체 기업의 사례다.
상장 이후 3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보이던 주가는 이후 3거래일 연속 하락하며 공모가보다는 높지만, 장중 최고가 대비 31.5% 낮아진 154.60달러로 마감했다.
관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번 회사채는 5년에서 30년 만기로 최소 200억 달러 규모로 발행될 예정이다. 조달한 자금은 부채 상환에 우선 사용하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기업 운영 목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앞서 주요 신용평가사들은 10일 적자 상태인 이 기업에 대해 ‘투자 가능’ 등급을 부여했다.
해당 기업은 자회사들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올 3월 단기 임시 대출을 활용했다. 6개월 내 상환해야 할 단기 대출 규모만 200억 달러에 달한다.
인공지능 자회사는 매년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지난해에만 대형 데이터센터 구축 등 시설 투자에 약 19조 원을 지출했다.
글로벌 투자은행은 이 기업이 2031년까지 순부채 4000억 달러를 쌓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다른 대형 기업 부채 규모의 3배에 해당한다.
애초 이 기업은 이달 10일 공모를 통해 총 약 116조 원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이후 추가 물량 배정이 이뤄지면서 자금 조달액은 약 130조 원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채권시장까지 활용하면서 시중 자금을 대거 흡수하게 됐다.
초대형 클라우드 기업들, 올해만 240조 원어치 회사채 발행
최근 엄청난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거대 기술기업은 우주기업만이 아니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모회사, 페이스북 모회사, 오라클 등 초대형 클라우드 사업자들도 올해 전 세계적으로 159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다.
이는 2024년과 지난해 연간 발행액을 합친 것보다 큰 규모다. 자체 현금과 지분 투자 자금만으로는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자 인공지능의 밝은 미래를 내세워 부채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경쟁적으로 펼치고 있다.
주요 클라우드 기업 6곳이 올 초 제시한 연간 시설투자 계획은 아마존 2000억 달러, 구글 1750억∼1850억 달러, 마이크로소프트 1400억 달러, 메타 1150억∼1350억 달러, 오라클 500억 달러 등 총 7000억 달러를 넘는다.
미국 주요 은행은 이들이 앞으로 3년간 연간 140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아마존은 이달 9일 캐나다에서 약 15조 4000억 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다고 공시했다. 이는 캐나다 회사채 시장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아마존의 이번 채권은 3년에서 30년까지 5개 만기 구조로 발행됐다. 아마존은 3월에도 8개 만기로 구성된 약 25조 5000억 원 규모의 유로화 채권을 발행해 해당 지역 회사채 시장 최대 기록을 새로 썼다.
지난해 초 이후 지금까지 발행한 채권 규모만 약 105조 원이 넘는다.
아마존은 나아가 이달 8일 여러 주요 은행에서 총 약 26조 6000억 원 규모의 대출을 받았다고 공시했다. 수익을 내는 기업임에도 지출 비용이 이를 압도하다 보니 부채시장의 자금을 끌어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아마존뿐 아니라 메타도 지난해 10월 사상 최대 규모인 약 45조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신청했다. 이후 메타는 올 4월 250억 달러 상당의 채권을 발행했다.
구글 모회사 또한 2월 200억 달러 상당의 채권을 발행한 데 이어 지난달 캐나다에서도 85억 캐나다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팔았다. 캐나다 채권시장에서는 아마존 이전까지 최대 규모 발행 기록이었다.
이 기업은 지난달 일본 엔화 표시 채권도 처음으로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밖에 2월에는 오라클이 250억 달러,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이 200억 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각각 발행했다. 3월에는 클라우드 기반 소프트웨어 회사가 250억 달러를 채권시장에서 조달했다.
초대형 클라우드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최대 시가총액 기업인 반도체 회사도 이달 15일 250억 달러 상당의 채권을 발행했다.
애초 2년에서 30년 만기 채권을 200억 달러어치만 발행하려다가 수요가 폭증하자 물량을 250억 달러로 늘렸다. 결과적으로 해당 기업의 채권 발행은 850억 달러나 주문이 몰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 기업이 채권을 발행한 것은 2021년 이후 5년 만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자금 조달 경쟁은 회사채뿐 아닌 전환사채 시장으로도 번졌다. 영국 주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전환사채 발행 규모가 올 들어 지난달까지 약 87조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해당 기간 기준 사상 최고 수준이다.
통화정책 예고 중단에 월가 우려 확산
문제는 시장 자금이 한정된 상태에서 회사채가 과도하게 공급될 경우 투자자들을 모으기 위해 기업들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 기업 기초체력에 비해 발행 금액이 너무 클 경우 신용 위험이 발생하기에 채권 보상 금리가 자연스럽게 상승할 수밖에 없다.
민간 채권 물량이 늘어날 경우 당연히 국채의 투자 가치는 떨어지게 돼 시장 전반의 금리가 오르게 된다.
시중 금리가 들썩이는 데에는 중앙은행 의장이 통화정책 방향 예고를 전격적으로 폐지한 영향도 있다.
영국 주요 언론은 21일 중앙은행 의장이 통화정책 예고와 금리 전망 점도표를 폐지하겠다고 나서자 주요 투자자들이 금리 상승과 시장 변동성 확대를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중앙은행은 16~17일 회의 직후 낸 통화정책 성명서에서 기준금리를 기존 3.50∼3.75%에서 동결한다면서도 통화정책 방향 예고 내용은 제외했다.
또 중앙은행이 올해 말 기준금리 예측치 중간값을 3.8%로 제시하며 연내 한 차례 금리를 올릴 수 있음을 시사한 가운데, 의장은 19명 위원 중 유일하게 예상 금리를 제출하지 않았다.
의장은 지난 4월 청문회 때부터 미래를 예고하는 점도표와 통화정책 예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의장은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정책 성명서가 다소 간결해졌고 일부 오래된 표현은 생략됐다”며 “현재의 정책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통화정책 예고도 포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점도표를 ‘지우개 달린 연필’에 비유하며 “나는 경제전망에 대한 오랜 견해에 따라 전망을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통화정책 방향 예고는 인터넷 산업 거품이 정점을 향하던 1999년 5월 처음 도입한 이래 간헐적으로만 사용하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부터 성명서에 고정적으로 삽입되기 시작했다.
물가 상승에 대한 시장 불확실성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당시 의장은 그해 정례 기자회견을 도입하고 2012년 1월부터는 점도표까지 공개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주요 자산운용사 최고투자책임자는 “중앙은행의 방침은 투명성 저하를 부를 것이고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투명성이 낮아지면 추측과 불확실성이 커지고 보상 금리가 높아진다”고 경고했다.
해외 주요 은행의 전략 책임자는 “금리 인상에 대한 위험 보상과 변동성 증가를 모두 가격에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앙은행의 정책 변화와 회사채 발행량 급증으로 당분간 채권시장의 금리도 상승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나아가 중동 종전 협상 진행 경과와 물가 부담에 따른 영향도 지속적으로 시장에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기 전에 이미 시장 자체 금리가 들썩일 수 있다는 의미다.